여행하기 위해 돈 법니다./여행의 온도

낯선 곳에서 낯설게 만나, 낯설지 않은 사이로.

낭만여행작가 2020. 3. 1. 21:50

삿포로에서 '러브레터'는 못 찍었지만, 먹방 메이트는 구했구나.

 

여행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정말 예상치 못한 인연을 만들기도 한다.

보통 여행을 다녀와서 친구들과 여행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 날의 감정을 오롯이, 정확히, 생생히 전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날의 순간을, 추억을, 감정을, 온도를 함께 공유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친구들에게 여행을 설명할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사진을 보여주는 것.

 

2017년 연말, 4일간의 삿포로 여행을 나 홀로 보내다 12월 31일이 되었다. 문득 외롭다는 생각과 카운트다운을 함께 할 사람이 있으면, 맥주 한 잔 함께 나누며 수다를 떨 친구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에이를 다녀오기도 하고,
흰 수염 폭포를 다녀오기도 하고,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풍의 마을을 다녀오기도 하고,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수북이 쌓인 눈을 바라보며 온천을 하기도 하고
근교인 하코다테의 유명한 별 모양의 정원도 다녀오기도 하고,
일본 신 3대 야경이라고 불리는 하코다테의 야경을 바라보기도 하며 4일을 보냈다.

 

 

유럽이나 저 먼 타지에서는 지나가는 한국인에게 말도 걸어보고, 친구가 되기도 하지만, LCC의 성장으로 진입장벽이 낮아진 덕분에 여기가 한국인지 일본인지 모를 정도로 한국인이 많은 일본 여행지에서 한국 사람을 보았다는 이유로 말을 걸기는 쉽지 않다. 신천지처럼 뻔뻔함을 갖고 말을 걸면 모를까.

 

그래서 네이버 카페에 카운트 다운을 함께하고, 술 한잔을 함께 할 동행을 구하는 글을 올렸다. '이렇게 글을 올리면 연락이 오긴 할까...?'라는 의문점과 함께. 

아니나 다를까, 글을 올린 지 3시간이 지났지만 나랑 동갑이었던 친구 한 명 외에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흠 뭔가 애매한데...'라는 생각이 들며 간단히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씻고 나오는데, 아니 갑자기 핸드폰에 카톡이 쌓여있는 게 아닌가? 나처럼 외롭게 새해를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또 있었구나 하는 감사함이 들었다. 연락을 주고받고 장소를 정하면서도 계속 카운트 다운을 함께하자는 카톡이 쌓여갔다. '아, 연예인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잠시 쓸데없는 상상도 하면서. 

 

일본의 가게는 대부분 협소하고, 단체 손님이 방문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터라 8명 정도로 인원을 제한하고 모임에 나갔다. 처음 만나기로 한 사람의 이름이 '수지'와 '진아'여서 괜히 설레게 만들었지만, 누구보다 건장했던 형 둘을 만나 남자 셋이서 어색하게 술을 먹기 시작했다. 낯선 남자 셋이 만나서 할 수 있는 건 며칠 동안 각자 즐겼던 삿포로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뿐이었다. 소재가 슬슬 고갈되갈 때쯤, 사람들이 하나 둘 오기 시작했고, 여성 친구가 들어왔을 때의 그 형들의 표정은 잊히지 않는다. 결국, 나중에는 2명 정도는 약속을 취소하고, 친구들이 게스트하우스에서 3명의 친구를 더 데려와 총 9명이 만나게 되었다.

어떤 모임이건, 심지어는 서로를 잘 아는 중고등학교 친구 모임에서도 모든 사람의 성향이 잘 맞고 취미가 맞기는 쉽지 않다. 우리 아홉 명은 적어도 술 먹고, 또 먹고, 또 먹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이었다. 주종은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를 떠나지 못하게 한 주범 중 하나.

 

 

8시쯤 만났던 것 같은데, 어느새 카운트다운을 하러 갈 시간인데 술도 더 먹고 싶고, 분위기도 너무 좋아 누구 하나도 맥을 끊을 수 없었다. 결단력 있는 똑 부러진 친구 하나가 카운트 다운 가야 할 시간이라고 끊어주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이자카야에서 카운트다운을 할 뻔했다.

 

2017년 12월 31일, 23시 55분, 간신히 삿포로의 메인 광장에 도착했다. 마침 함박눈이 내린다. 내가 본 카운트 다운 중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웠던 새해맞이. 새로운 사람들과 왁자지껄 떠들며 보아서, 아니면 술을 꽤나 마셔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별거 없는 삿포로 도심도 로맨틱한 도시로 보이기 시작했다.

 

카운트 다운을 즐기기 위해 삿포로치곤 인파가 모였던 그 광장.
함께 새해를 맞은 우리들. 한 명은 사진 찍는 중...이 아니고 화장실에 갔다...
마침 함박눈이 내려, 더욱 로맨틱하고 아름다웠던 2018년   새해맞이

 

그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도 잠시, 끊겼던 맥을 다시 살리기 위해 다른 이자카야로 향했다. 놀랍게도 돈이 부족해 고민한 친구는 있었지만, 2차 가는 것을 고민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사실 예상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새벽 5시까지 술을 즐겼다. 

그 날 새벽 비행기로 삿포로를 떠나는 사람도, 삿포로 여행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비에이 투어를 가는 사람도, 오타루를 가는 사람인 나도 있었지만. 누구도 쉽게 일어날 수 없을 그날의 열기와 분위기는 그랬다.

 

아마도 새벽 3시경?
그 다음 날, 오타루로 향한 사람은, 나였다.
오타루의 반짝이는 운하. 술이 덜 깬 상태에서도 아름다웠던 도시.

 

 

이후 2018년 여름에는 함께 부산에 살던 친구도 만날 겸 부산 여행도 떠났다.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든 사람과 또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있다. 그날의 추억 덕분에 우리는 함께 다 같이 모이지는 못하더라도 매 달 만나고 있고, 카톡방의 대화도 끊기지 않는다.

그 날 이후, 군인이 된 사람도, 이직을 한 사람도, 결혼을 한 사람도, 이사를 간 사람도 있지만, 연말이 되면 괜히 그 날 기억이 떠오르고, 2주 전처럼 눈이 펑펑 올 때면 그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제는 눈만 보면 삿포로와 사람들이 떠오른다.
2018 여름, 부산에서 다시 만난 우리들.
이 날도 해가 뜰 때 까지 술을 마셨다. 이번엔 일출을 보게 될 줄이야.

 

평생 기억할만한 추억을, 살면서 쉽게 겪지 못할 경험을, 함께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이 에피소드에 이야기를 여자 친구였던 사람에게도, 친한 친구에게도 풀어봤지만, 오롯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웠다. 

살면서 언제 또 이렇게 낯선 타지에서 낯설게 만나, 10시간 가까이 술을 함께 마시고, 새해를 맞이하고, 눈도 함께 맞으며, 낯설지 않은 사이가 될 수 있을까. 

정말로, 정말로 좋은 일이다.

 

어제의 추억을 회상하러 혼자 다시 방문한 그 광장.

 

추가 에피소드.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삿포로에 도착한 첫날 혼자 양갈비를 먹으러 가 웨이팅을 하던 중 내 앞에 친구 사이인 여자 둘이 있었고, 내 대각선에 앉아 파파고를 열심히 쓰며 주인장에게 말을 걸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친구들과 만나 술 한 잔을 할 때 그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각자의 핸드폰에는 그 양갈비 집에서 밥을 먹던 서로의 모습이 있었다. 정말 놀라운 인연이다.

 

 

우리가 친구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그 날.
우리가 친구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그 날, 그리고 혼자 참 잘먹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