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에서 보낸 14일.
쿠바에 가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7시간 비행기 연착. 짐 검사만 다섯 번은 했다. 짐도 일일이 다 꺼내보고. 이러다 정말 쿠바에 못 가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결국 예상보다 많이 늦은 시간에 아바나에 도착하였다.
쿠바에 공산주의의 나라는 어떨까라는 궁금함으로만 방문하게 된다면, 무한한 실망감만을 가져다줄 것이다. 쿠바는 이미 관광객들에 의해 많이 변하였고, 관광객들이 볼 수 있는 곳은 다른 관광지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레스토랑과 동네 마켓에서는 버젓이 코카콜라를 팔고 있고, 라디오에서는 미국 팝송이 흘러나오고, 티비에서는 미국 프로야구를 보여주기도 한다. 100원쯤 하는 지폐는 체 게바라가 인쇄되었다는 이유로 천원이 넘는 가격에 팔리기도 한다. 못 사는 관광 국가들이 그러하듯이, 쿠바의 거리에도 온갖 삐끼들, 바가지,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사기들이 판을 친다. 장관이 따로 없다는 말레꼰 거리는 성매매 만남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혁명을 외치던 체 게바라의 얼굴이 외화벌이 수단이 되어버린 이 아이러니함 속에서도 쿠바는 매력적이다. 특히 술, 살사, 그리고 노래와 함께한 쿠바의 밤은 더욱이 매혹적이다. 관광객들을 돈으로 보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끝없는 순수함과 정을 보여주었다. 자유롭고, 행복하고, 마냥 즐겁게 사는 일반 시민들을 보면서, 괜히 나까지 행복해지고 웃음이 지어졌다. 어딜 가나 뜬금없는 장소에서 수영을 하며 해맑게 웃는 아이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쿠바에서 14일 동안 밤은 정말 꿈만 같고 특별했다. 쿠바를 '관광'하듯이 즐긴다면 분명 실망할 것이다. 캐나다나 스위스처럼 눈부신 자연을 가지지도 않았고, 미국이나 태국처럼 오락거리가 발달된 곳도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여행객들이 쿠바를 찾는 이유는 분명 있다.
허물어져가는 건물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들, 밤을 빛내 주는 아름다운 라이브 연주들과 격렬한 살사 댄스, 중남미에서 아마 유일하게 안전 걱정 하나도 없이 여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는 밤거리, 에메랄드 색으로 빛나는 카리브 해변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말레꼰의 석양.
그래도 쿠바는 바뀌어야 한다. 관광객들이 주는 눈앞의 돈 때문에 이미 많이 붕괴되었다. 물가도, 화폐제도도, 사람들 마저도 너무 많이 바뀌었다. 혁명 이후 50년 보다, 최근 5년이 훨씬 많이 바뀐 쿠바. 경찰, 의사들 보다도 불법 시가 판매상, 불법 택시 기사, 창녀들과 같은 블랙마켓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이 버는 이 구조는 분명 지속적인 쿠바를 위해서 바뀌어야 한다. 관광객을 상대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이 1달 일하면 40달러를 번다고 한다. 이 돈으로는 쿠바 물가를 고려해도 제대로 한 달 먹고살기가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주로 말레꼰에서 영업하는 여자들은 하룻밤에 최소 40달러를 번다. 그래서 심지어는 가족들도 딸들에게 그 길로 가길 권유하기도 한다.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의 한 방이 그런 방을 위해 꾸며 놓은 집도 있단다. 관광객들이 보는 아름다움과 순수함 속에 가려진 이런 쿠바 모습들이, 정말 지속 가능한 나라, 지속 가능한 관광을 위해서라도 많이 바뀌었으면 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즐겁다가도, 삐끼들과 사기꾼들 때문에 열 받았던 이 쿠바에서 14일은 어느새 끝이 났다. 와이파이 하나 없이 세상 물정 모르고 여행한 이 14일은 너무나도 특별하다. (방문한 당시는 어떠한 와이파이도 연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쿠바를 떠나기가 못내 아쉬웠고 섭섭했다. 6일을 머문 아바나의 숙소 아주머니와 인사하고 나오는데 다른 나라를 떠날 때와는 많이 달랐다.
그렇게 쿠바를 가기 싫다 징징대서 그럴까. 깐꾼으로 향하는 나의 비행기는 17시간이 연장되었다. 올 때 연장 갈 때 연장 총합하면 하루다. 끝까지 얄미운 짓만 골라하는 쿠바.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쿠바. 조만간 다시 와야지. 마지막 숙소 아주머니와의 인사도 Adios (잘 있어/잘 가)가 아닌, Hasta luego(또 만나/see you)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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